“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체육학이 재미 없었던 ‘축구선수’ 서민우
신중하지만 할 말은 꼭 해야하는 당돌한 신인
선수가 화두 던지고 팬들과 토론하는 신선한 문화충격

서민우가 인스타에 올렸던 글

축구 전술사를 인류 문명에 비유하자면, 리누스 미헬스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축구가 진정한 의미에서 전술적 논의를 갖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는 전술이라는게 존재는 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조악하고, 깊은 논의가 없는 그런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크루이프와 사키같은 걸출한 감독이 등장하면서 축구 내적으로 보다 높은 전술적 논의가 이뤄집니다. 그러니까 조금 거친 비유지만 미헬스 등장과 함께 축구에도 문명이라는게 생겼다고하면 대략 맞는 비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1세기에 이르러서 가장 큰 전술적 파문을 일으킨 감독은 누가 뭐라고해도 펩입니다. 펩 이전에 전술가적 관점에서 축구를 크게 발전시킨 21세기 감독은 크게 조세 무리뉴나 아르센 벵거같은 감독이 있는데, 무리뉴는 더 이상 예전만 못한 감독이고, 벵거는 말년에 좋지 못한 모습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럼 한 때 당대 최고 반열에 올랐던 감독들이 어떻게 저렇게 평범해질까요? 대부분 이런 말씀들을 하시죠. '전술은 돌고 돈다'고, 정말 그럴까요? 다시 문명에 빗대서 제 의견을 풀어보겠습니다.

언제는 도끼가 유행하고, 언제는 창이 유행하고, 그 다음에는 활이 유행하는걸까요? 이 논리에도 그다지 동의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봅시다.

펩 등장 이전의 축구가 청동기였는데, 펩은 혼자서 철기시대의 축구를 한겁니다. 청동으로 만든 검, 창, 도끼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일까요. 철기로 만든 무기 들고나와서 백병전하니까 상대팀들 그냥 다 썰려나간거예요. 3연패 마드리드부터 최근에 챔스에서 우승한 모든팀, 또 우승에 근접했던 팀들 중에 펩 1~3년차의 바르셀로나보다 위압감이 큰 팀은 없었습니다.

단언컨대 펩이 등장할 때 당대에 펩 바르사의 적수는 없었습니다. 단순히 메시가, 세 얼간이가 미친듯이 잘해서 우승을 쓸어담았을까요? 물론 메시와 챠비, 이니에스타, 부스케스, 알베스같은 선수들의 개인 기량이 트로피 수집에 영향을 끼친건 사실이에요. 좋은 선수쓰면 당연히 우승할 확률 높아지죠.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선수들의 수준이 아닙니다. 펩이 구사했던 축구의 수준이예요. 펩 등장 이전에 최고의 감독은 무리뉴였습니다. 그리고 펩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내려오다가 첼시 2기시점부터는 평범해졌어요. 무리뉴는 펩이 등장한 후부터 지금까지 감독으로서 별로 발전한게 없는데, 세계 축구의 평균적 수준은 높아진겁니다.

과연 펩이 1~3년차에 정점을 찍고 내려왔을까요? 제 생각엔 유지중이라고 봅니다. 본인도 좀 나아졌는데 세계축구 평균도 그만큼 발전했다고 봅니다.

펩의 가장 큰 업적은 트레블 2번했고, 부임 첫시즌에 6관왕을 했고, 잉글랜드, 스페인, 독일에서 모두 리그 우승을 경험해봤다는 그런게 아닙니다. 펩의 가장 큰 업적은 자기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축구를 세계에 보여줌으로써 수 많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고, 전술적으로 축구를 팽창시킨겁니다. 펩은 지금 은퇴해도 존중 받아야되고 트로피 말고도 가산점 받을 요소가 많다고 봅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펩이 시티 1년차에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던걸요. 2년차에 승점 100점 찍으니까 그제서야 그런 여론이 사그라들었죠. 클롭은 또 어땠나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업적으로 사람간의 기량을 평가해서 줄세우기를 합니다.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이겠죠. 본질이 아니라 드러난 현상에만 매몰되는 것이죠. 아니면 진실을 취사선택해서 믿는 것 일수도 있죠.

결국 우승이라는건 지극히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나온 부산물일 뿐입니다. 매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팀이 그 시즌에 가장 강했던 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언컨대 저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트로피보다 실질적인 실력을, 기량을 논하는게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승 트로피와 개인 수상에 너무 집착합니다. 메시가 대표팀에서 우승을 못했다고 깎아내리거나, 호날두가 유로 우승을 했다고 평가가 급등하는 것들이요.

스포츠는 결국 결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낳는 것은 과정이고, 크루이프가 말했듯, 결과없는 과정은 무의미하지만, 과정없는 결과는 지루하겠죠. 우승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있을까요? 혁신은 세상을 좋게 바꾼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펩이 등장과 함께 보여줬던 것들은 충분히 축구에서 혁신적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이지요.

‘끝까지 참신함을 유지해라, 영감을 얻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라.'

혁명가가 그들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죠. 말은 간단하지만, 참신함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단순히 한번 참신함을 주도한 사람과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흐름을 주도하면서 커리어가 끝날 때까지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일 것일 거죠. 어쩌면, 1회 성이냐, 다회성이냐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축구 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변화를 이끌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이들은 만인의 분석, 연구 대상이 되고, 그들이 취하는 행동, 사고방식은 고스란히 분석당하고, 대부분은 후대에 보편적인 가치로 자리매김해왔고, 이것은 축구 내적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흐름을 따라가려면, 경직되지 않고 유연한 사고가 가능해야 할 것이고, 경직된 사고는 자신의 단점을 발견했을 때, 즉각적으로 변화를 꾀하지 못하게 방해할 것이며, 자신의 단점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발견할지라도 안일한 생각과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를 낳을 수 있을 겁니다. 유연한 사고를 한다면, 흐름에 뒤처지지 않을 것이며, 영감을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타고난 천재성에 기반한다면 지속적으로 트렌드를 이끌 가능성이 높고요.

혁명가로 여겨졌던 이들의 몰락에는 시대를 앞질러간 그들의 철학, 사고 등이 보편적인 가치로 인식되고, 결국에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펩 바르사와 펩 바이언, 펩 맨시티의 시스템은 어느 정도 차이를 보여주고 있고, 그것은 곧 펩 과르디올라가 적어도 1회 성의 혁신을 이뤄낸 감독이 아님을 방증할 것입니다. 그는 이미 혁신을 이끌었고, 지금도 가장 핫한 지도자일 것입니다.

펩이 여전히 세계최고 수준에 있는 감독이라 확신합니다. 다만, 최고 수준에 있는 것과 그걸 피치에서 결과로 드러내 보이는건 조금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펩을 지지하지만, 세상에 '무조건 점유 축구만이 옳고, 가장 완벽한 축구'라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완벽한 축구가 있다면 축구가 얼마나 시시해질까요? 더 이상 완벽해질 여지가 없다는 의미일테죠.